어크로스 상반기 기획전
독서의 놀라운 효능 티셔츠

《웃기려고 한 과학 아닙니다》
실험실의 돈키호테들이 전하는 낭만과 똘끼의 현장

《경험의 멸종》
멸종 위기에 놓인 ‘인간다운 삶’을 구출하라
《예술이라는 일》
에밀리 디킨슨의 흔적을 담은 북마크

《잔소리탈출연구소 1. 집중력 도둑을 잡아라》
어크로스주니어의 첫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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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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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 위해 잃어버리는 것들
《납작한 말들》을 편집하는 동안 자꾸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납작한 말들’이 제가 겪었던 일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죠. 가령 “어쩌라고? 넌 친구도 없잖아”는 제가 실제로 학창 시절에 들었던 말이기도 했습니다. 급식을 먹을 때마다 자꾸 툭툭 치는 아이에게 항의하자 저에게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친구가 없을수록 반에서 서열이 낮다는 것이고, 서열이 낮은 아이에게는 함부로 해도 된다는 인식의 표현이었을 겁니다. 영화를 좋아하고, 자전거 타는 걸 좋아하고, 《호밀밭의 파수꾼》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저의 다른 특징들은 ‘친구가 없는 아이’라는 정의와 함께 납작하게 찌그러졌습니다.반대로 제가 타인을 납작하게 찌그러뜨린 경험들도 생각이 났습니다. 면접장에서 다른 경쟁자들이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에 따라 안심과 불안을 오가는 에피소드도 제가 실제로 경험한 일이거든요. 그 지원자들에게는 수많은 삶의 맥락이 있겠지만, 저에게는 그들이 ‘어느 대학 출신 경쟁자’로만 인식되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친구의 숫자’와 마찬가지로 ‘출신 대학’이 사람의 급수를 나누는 잣대로 사용되었기 때문일 겁니다.이 책의 프롤로그 제목인 ‘살아남기 위해 잃어버리는 것들’을 다시 한번 떠올려봅니다. 저자 오찬호의 말대로 우리는 극단적인 경쟁 사회에서 생존에 도움 되지 않는 것들을 차단해버리며 살아왔습니다. 인문학 공부,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적 사유, 주류에서 벗어난 상상력 등은 가급적 외면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나아가 생존주의와 능력주의를 모든 일을 평가하는 잣대로 삼았습니다. 서열이 낮은 사람은 당연히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납작한 생각’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요? 풍성하고 입체적인 우리의 삶이 이렇게 납작해져도 괜찮은 건가요? 《납작한 말들》을 읽으며 모두가 납작해지는 아포칼립스에서 벗어나 타인의 입체적인 삶을 상상해봤음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도서관과의 첫 만남이 기억나시나요?
여러분은 도서관과의 첫 만남이 기억나시나요? 저는 생생합니다. 안국동에 있던 할머니 댁을 갔는데 주변에 놀 만한 곳이 정독도서관뿐이었어요. 동생과 함께 한참을 뛰어다니다가 땀도 식힐 겸 어린이실에 구경 삼아 들어갔는데 정신 차려보니 네 시간이나 지나 있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마주한 기분이었습니다. 해리 포터가 9와 4분의 3 승강장을 지나 처음 호그와트행 급행 열차에 몸을 실었을 때, 루시가 낡은 옷장 문을 열고 나니아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처럼 말이지요. 그렇게 제 삶은 바뀌었습니다. 무언가를 읽고 쓰고 질문하고 상상하는 재미에 홀려버렸어요. 도서관에 스며들고 만 것이죠.그로부터 대략 25년이 흐른 지금, 저를 다시 한번 '도며들게' 한 책을 냈습니다. 초대 서울도서관장 이용훈, 도서평론가 이권우, 천문학자 이명현, 펭귄각종과학관장 이정모 저자의 신작 《그래서 우리는 도서관에 간다》입니다. 네 분 저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도서관 생활자'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습니다. 살아온 환경도, 활동 영역도 저마다 다르지만, 도서관을 만나 읽고 쓰는 사람으로 성장했고 지금도 그 주위를 공전하며 살고 계시니까요.《그래서 우리는 도서관에 간다》는 도서관 생활자 4인방의 도서관에 관한 노변정담입니다. 종로도서관에서 책으로 '놀던' 소년 이명현, "책을 통해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게 좋아서" 사서의 꿈을 품은 학생 이용훈, 원형 도서관에 앉아 온갖 책을 섭렵하며 인문학적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청년 이권우, 독일 본시립도서관 사서들의 집념 어린 권유로 읽은 책들이 계기가 되어 첫 책을 쓰게 된 신인 작가 이정모의 이야기는 도서관이 한 사람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절감하게 하지요.그런가 하면 《코스모스》 '은하 대백과 사전' 개념을 설명하면서 도서관을 '인류 문명의 중간 기지'라고 명명하고,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지켜낸 시민적 연대의 뿌리를 도서관에서 찾기도 합니다. 오직 종이책 서가에서만 가능한 지식의 '우연한 발견'이 AI 시대에 필수적인 '새로운 질문'을 배양한다는 역설도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도서관에서 책 읽는 '무상의 독자'가 지갑을 열어야 출판도 존재한다는 일갈은 독서 생태계에서 도서관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한가를 새삼 일깨우더군요.저자 네 분들의 유쾌하면서도 진솔한 대화를 따라가면서 든 생각이 있습니다. '도서관을 향한 고민과 애정에도 얼굴이 있다면 이토록 다양하고 깊이 있는 표정이 나올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지요. 이 책은 단순명료한 한마디로 일축할 수 없어서 더욱 가치 있는 책입니다. 기술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과 자본의 논리가 우세하는 시대에 어떻게 해야 도서관이 메마른 정서의 목을 축이고 다양한 생각의 씨앗을 움트게 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지를 두고, 네 명의 저자가 무궁무진한 아이디어 배틀을 벌이거든요. 책과 도서관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을 초대합니다, 도서관 생활자들의 치열한 노변정담의 현장으로요. 벌이거든요. 책과 도서관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을 초대합니다, 도서관 생활자들의 치열한 노변정담의 현장으로요.

어른이 되어서도 문해력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거 아시나요?
Y는 유달리 활달했습니다. 잘 웃고, 이야기가 많아서 쉬는 시간마다 시끌시끌했지요. 친하진 않아 멀찍이서 바라보기만 했지만, 말주변이 없던 저는 내심 Y가 부러웠던 것 같습니다.그런 Y가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는 시간이 있었으니, 바로 국어시간이었습니다. 지목된 학생은 일어나서 교과서 지문을 읽어야 했죠. “오늘은 5일이니까 5번, 그 뒷사람 일어나.” 국어 선생님의 지시에 쭈뼛거리며 일어난 Y는 천천히 국어책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러다 Y의 입에서 ‘꾹찍꾹찍’이라는 발음이 튀어나왔습니다. ‘굵직굵직’을 잘못 읽었던 거예요. 터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어찌어찌 지문을 끝까지 읽은 Y는 벌게진 얼굴로 자리에 앉았습니다.《문해력 격차》를 편집하며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대로라면 Y는 ‘소릿값’을 제대로 모르는 아이였던 것이지요. 잘 읽지 못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우리는 비웃었고 선생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벌써 30년도 더 지난 일입니다.요즘은 달라졌을까요? 한때 ‘교실에서 한 명씩 교과서를 읽게 하면 잘 못 읽는 우리 아이가 주눅 드니 하지 말아달라’는 학부모 민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그 부모는 아이가 자라면서 자연스레 잘 읽게 될 거라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문해력은 때가 되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문해력이 부족한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지요. 아이가 잘 읽는지, 제대로 읽는지 세심히 살피고 잘 읽어낼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이 부모와 사회의 역할이라고 《문해력 격차》의 저자들은 말합니다.어른이 되어서도 문해력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거 아시나요? 내가 잘 읽고 있는지, 제대로 읽고 있는지 스스로 살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숏폼에, SNS에, 멀티태스킹에 집중력을 도둑맞을 때 문해력도 함께 도둑맞았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요. 퍼뜩 불안감이 엄습했다면, 잃어버린 문해력을 되찾고 싶다면, 《문해력 격차》를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기술이 모든 것을 매개하고 있는 이 시점에, 오프라인을 지향하는 마음
얼마 전, 오랜만에 지하철에서 이어폰도 빼고, 동영상이나 웹툰을 보지도 않고 그저 앉아 있었습니다. 옆 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어요. 한 할아버지가 화를 내며 제가 있는 칸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쌍욕을 하며 두리번거렸지만, 시비를 걸 사람을 찾지 못하고 다시 옆 칸으로 이동했습니다. 아무도 그 할아버지를 쳐다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들 이어폰을 꼽고 화면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할아버지의 존재를 ‘인식하기로 결정한’ 사람은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몇 사람과 제가 전부인 것 같았어요. 승객 대다수는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할아버지가 주는 불쾌함을 애써 피하고 있었습니다. 중립적인 무관심의 표정을 띈 채로요. 그렇지만 만약 할아버지가 제게 시비를 걸어왔다면 누가 말려줄 수 있었을까요? 아니, 할아버지가 시비를 거는 사람이 아니라 도움을 요청하는 중이었다면 누가 나섰을까요? 저는 익숙한 고립감을 느꼈습니다. 한 공간에 있지만 서로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다면,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는 거라고 할 수 있을까요?《경험의 멸종》에서 저자인 크리스틴 로젠은 이런 현상을 장소의 소멸로 설명합니다. 우리를 연결해주던 공간은,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대표적인 경험들-대면 상호작용, 손으로 쓰고 그리는 것, 기다림의 순간, 감정을 느끼는 것, 쾌락을 즐기는 일-과 마찬가지로 점차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 사라진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건 디지털 기술입니다. 우리는 챗GPT에게 문서 요약을 맡기고, 비대면 미팅 플랫폼을 통해 소통하고, 소셜 미디어에 실시간으로 일상을 업로드합니다. 실제로 어디에 있느냐보다 어떤 웹상의 공간에 접속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해졌죠.이 책을 읽다 보면 잠시라도 오프라인으로 있고 싶다는 마음이 커집니다. 물론 이 책이 디지털 디톡스를 권하기 위한 책은 아닙니다. 인터넷에 연결되지 않은 사람들도 작금의 디지털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기술이 모든 것을 매개하고 있는 이 시점에, 오프라인을 지향하는 마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자는 아직 직접 경험의 멸종을 막기에 늦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저항은 더 어려워질 겁니다. 마치 핸드폰에 줄이어폰을 꽂을 구멍이 점차 사라지는 것처럼요. 기술을 통해 얻은 것들에 집중하느라 디지털 기술로 인해 잃어버린 현실에 주목하지 못했다면, 이 책이 우리가 상실한 것을 회복할 첫 걸음이 되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