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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평함에 대한 작은 이야기

24-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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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평함에 대한 작은 이야기

24-06-05

결핍의 덫(scarcity trap)이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이나 시간 등의 자원이 부족할 경우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는 것인데 조금 더 설명드리자면 이런 겁니다. 작은 실수로 어처구니없이 해고당한 여성이 당장 생필품이 부족해지자 신용카드로 물건을 급하게 대량 구입하고는 연체료를 납부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처합니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저지르지 않을 실수였지만 궁핍 상태에 처한 뇌는 그렇게 ‘조금만 더’ 생각하는 일을 허용하지 않죠.

 

이건 지능의 문제도 게으름의 문제도 아닌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이 만들어내는 덫입니다. 이 덫에 걸린 사람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이 불가능해서 현재 상황을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죠. 현대 사회, 특히 성공을 개인 노력의 결과로 생각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게으르다고 비난하거나 성공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이 노력한다고 추앙하는 태도가 놓치는 것이 바로 이런 문제입니다.

 

“특성화고, 일반고, 과학고를 다 거친 선생님이 말하는 경쟁의 실체”라는 제목의 영상이 바이럴 된 적이 있습니다. 영상에서는 교사가 일반고 학생들의 생기부(학교생활기록부)가 짧은 이유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데요. 넉넉한 집안의 아이들은 대단하지 않은 실력으로도 연주회나 발표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그럴 때마다 잘한다는 격려를 받으며, 칭찬 또는 인정에 익숙해지는 반면, 그럴 기회 없이 자라는 아이들은 그런 자신감 없이 오로지 ‘실수하면 안 된다’에만 집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외로운 사람들도 일종의 궁핍을 겪습니다. 이들이 겪는 궁핍은 인간관계의 부족, 즉 친구가 없는 것이죠.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자신이 상대방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는 것. 그렇다 보니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말과 행동이 어색해지는데, 사람들은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인관계에서 실수를 하면 안 된다는 집착이 친구를 사귀고 인간관계를 확장하는 것을 막는거죠. 하지만 이는 그 개인이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궁핍한 환경이 만들어낸 결과이며 아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그들을 붙잡고 있는 환경입니다.

 

이번에 출간한 책 <친애하는 슐츠 씨>의 1부 첫 글로 이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제목은 ’세상의 모든 멜라니들‘. 뉴욕 브롱스의 가깝고도 먼 두 학교 이야기를 중심으로 지역, 부모님, 경제력, 학력, 장애, 성별 등 여러 가지 배경 조건들이 결과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는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주는 글입니다.


이 책 속 첫 꼭지의 글, 꼭 한번 살펴보시고 글의 힘이 느껴진다면 책도 사보시길 권합니다. 이 책의 띠지 카피에 이런 말을 썼습니다. “얼마나 많은 차별이 무지에서 비롯되는가”라구요. 우리가 보지 못한, 깨닫지 못한 차별과 편견을 깨뜨려 줄 수 있는 책이라고 자신있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