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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키즈존에서 노차이니즈존까지 : 예견된 차별

25-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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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키즈존에서 노차이니즈존까지 : 예견된 차별

25-11-03

성수동의 한 카페가 ‘노차이니즈존’을 선언했습니다. ‘국적’을 가려 손님을 받겠다는 이 방침은 10년 전 이른바 ‘노키즈존’ 논란이 처음 불거졌을 때 느꼈던 불쾌한 예감을 다시 떠올리게 했습니다. 이번에 제가 편집한 홍성수 교수의 책 《차별하지 않는다는 착각》에서 저자는 줄곧 경고합니다. 누군가의 출입을 제한하는 일이 ‘사장의 자유’로 정당화되는 순간, 차별은 하나의 사회적 언어가 되고, 그 언어는 전염처럼 퍼져나간다고. 오늘 한국의 혐중 시위와 ‘노차이니즈존’은 바로 그 예언이 현실화 되버린거 같습니다. (너무 빠르네요...)


지금 혐중집회가 열리는 거리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차별과 혐오표현의 방패로 소환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도에서만 의미를 가진다고 홍성수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특정 국적을 이유로 손님을 거부하는 자유가 허용된다면, 그다음엔 장애인·여성·노인·성소수자를 거부하는 자유도 정당화되겠죠. 그건 자유가 아니라, 공동체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폭력입니다.


이번 책을 만들면서 한국의 혐중 정서에 대해 자주 생각해봤습니다. 뿌리가 뭘까. 역사?라기엔 그 양상이 왜 지금, 과거 어느 때보다 격렬하고 과격하게 변한 이유를 설명해주지 못하는 거 같습니다. 결국은 경제적 불안, 정치적 위기, 사회적 피로가 누적됐고 사람들이 손쉬운 희생양을 찾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습니다. 코로나19 때의 반중 정서, 12·3 계엄 사태 이후의 ‘중국인 간첩설’이 그 전형이었죠.


혐오는 언제나 ‘진짜 문제를 가리는 손쉬운 방법’이라고 홍성수 교수는 말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언제나 같습니다. 타인을 향한 증오로 사회의 신뢰가 무너지고, 결국 우리 스스로의 존엄이 훼손됩니다. 곧 “노차이니즈존”을 비판하는 일은 중국인을 두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우리 자신을 지키는 일입니다. 차별을 방치하는 사회는 언젠가 그 차별의 대상이 ‘나’로 바뀔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한다면... (너무 겁주는 거 같은가요...) 지금 필요한 것은 용기 있는 시민의 상식, 그리고 차별을 금지하는 법의 최소한의 울타리라고 생각합니다.


편집자 단상을 써야 하는데, 쓰다 보니 현안에 대해 칼럼이 돼 버렸네요. 어크로스 독자님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의견을 나눠주세요.